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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6. 25. 12:16 종교개혁

     

     *Catholic은 카톨릭으로 발음해야 된다.  Caritas를 가리타스로 말하는 또라이가 있더냐!  천주교는 기독교 다음으로 천주교가 언급되는 것을 몹시 싫어하다가 최근 Catholic을 가톨릭으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집요한 종교다.  카톨릭이 개혁교회를 얕잡아서 일컫는 말이 개신교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모르고 스스로 개신교라 하고 있다. 바른 표현인 "개혁교회"라는 용어가 있는데도 말이다. 

     

     

      ① 교황권의 토대를 놓은 레오 1세

      서로마 제국이 5세기 후반 급속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로 인하여 로마 제국에는 행정 및 군사적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다. 로마 시민은 로마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교회와 성직자에게 행정적인 권력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요청했고,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은 이를 잘 감당했다. 또한 로마교회는 제국의 침공 세력과 협상을 주도했고, 도시를 보호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에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LeoⅠ, 440-461)가 크게 활약했다.

     

      410년,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 시는 훈족의 수장인 알라릭에게 유린당하고 불태워져 크게 쇠락하고 만다. 434년, 유럽에 세운 훈 왕국의 왕인 아틸라(Attila)가 452년에 이탈리아 침입하여 로마로 향했다. 그때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가 혈혈단신으로 아틸라 진중에 달려가 담판하여 아틸라로 하여금 로마에서 물러가게 하였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함락시켰을 때는 비록 침입자들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로마가 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달족의 지도자 겐세릭(Genseric)과 협상을 주도한 것도 바로 레오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레오 1세는 로마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레오 1세가 바로 교황 수위권에 대한 기초를 세운 인물로, 그는 “로마교회를 세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령(decree)에 대한 반석이요, 기초요, 하늘나라 문지기이며, 결박하고 풀어주는 일을 위해 세움을 입었으며, 그의 판결의 효력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후계자인 교황을 통해 계속해서 그에게 위탁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는 지역의 대중들이 베드로를 공경하듯이 교황을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로마의 감독은 “성 베드로의 교황직을 가졌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를 순조하라”는 명령이 담긴 칙령을 황제 발렌티니안 3세로부터 받았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었다.


      ② 교황권을 확립한 그레고리 1세

       레오의 사망 후 130여 년이 지난 590년, 레오가 가진 교황제의 이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등장했다. 그는 교황제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로마 교황 전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 중 하나로 평가받고 중세 교회황권의 아버지라는 받고 있는 그레고리 1세(Gregory Ⅰ, 590-604)이다.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 1세는 로마의 공공사업을 정리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롬바르드족을 몰아내었다. 야만족이 침입한 시대에 교회는 침략을 완충해 주는 주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욱 발휘하여 야만족의 신앙을 바꾸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레고리 1세에 대한 로마시민들의 신뢰는 과거의 로마황제와 버금갈 정도로 커져갔다.

    레오 1세에 의하여 시작된 교황의 수위권 요구를 그레고리우스가 같은 근거 위에 다시 지상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 전체 교회에 대하여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했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또한 유능한 신학적 저술가였다. 오리게네스 이후 윤곽을 잡아 오기 시작한 ‘연옥설’은 그레고리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반포가 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聖者)들에게 하는 연옥 신앙이 증대하여가자 자연히 ‘면죄부’ 및 ‘죽은자를 위한 미사제도’가 동반하여 함께 발전하였다.

    그레고리 1세는 그밖에도 교직자가 된 후 결혼을 금하게 하였고, 교황청의 교회 감독권을 강화하고 ‘종교재판을 주도’하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성직자 지침서와 같은 『목자의 서』를 지어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그는 예배음악(그레고리안 성가)을 포함해 서구의 예배의식을 통일했으며 수도원을 후원했다. 그레고리는 이처럼 교세를 넓히고 교황의 권위를 높인 것은 물론 기독교의 교리와 예배의식(미사)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그레고리 1세는 단지 로마 교구의 감독이 아니라 로마 시와 그 일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감독이나 로마의 대주교라는 역할을 단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세속 군주의 역할과 같은 것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제 로마의 감독은 중부 이탈리아의 독립 군주와 같은 존재였다. 이런 연유로 후대의 사가들은 그레고리를 실질적 ‘초대 교황’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교황이라는 칭호의 발달


      ①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거부한 그레고리 1세

      그레고리 1세가 교황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교황’이란 칭호는 한사코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황이라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단지, 로마 교구가 상당한 정치적 위치와 재력을 가진 거대 교구였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해 있었을 뿐, 최고위(首) 감독이나 교황이란 개념을 그는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그레고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전된 지 100여 년이 훨씬 지났기에,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위상이 로마교회 이상으로 부상했다. 자연히 콘스탄티노플교회 대감독 요한은 자신을 ‘보편적 총대감독’(THE UNIVERSAL PATRIARCH)이라고 스스로 칭하며 교회의 수위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때 로마 감독이었던 그레고리 1세는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반대하면서 그러한 칭호를 쓰는 것은 악하고 불경건하고 가증하다며, 그에게 쓰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또한 자신에게도 그러한 칭호가 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율리기우스가 그레고리 로마감독을 ‘보편적 교황’(UNIVERSAL POPE)이라고 칭했을 때 그는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율리기우스를 꾸짖었다.

      “귀서의 서두에 저를 보편적 감독(교황)이라고 부르시며 제가 금지한 호칭을 저에게 일부러 쓰셨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치에 닿는 것 이상을 남에게 주시면 귀하는 그만큼 자신의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형제의 영예가 손상되는 것을 저는 영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리 1세는 어떤 대감독의 수위권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POPE(교황, 수감독)이나 PATRIARCH(총대감독) 등의 호칭이 수위권을 상징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거나 가져서는 안 될 가증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의 여러 서신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② 로마교회와 콘스틴티노플 교회의 교황권 다툼
      초대교회에서 단지 행정상의 구분에 불과하던 교구의 서열이 교리상의 교회의 수위권으로 오해되고 비화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교회의 위상이 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에 행정상 수위권이 주어진 것도 로마제국의 수도에 로마교회가 위치했고 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에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교회성직자들도 제국의 위엄을 위해 그들이 로마교회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이런 주장이 관철되어 콘스탄티노플교회도 로마교회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가결됐다.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수위권 다툼이 직접적으로 시작된다. 이 결정에 대해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는 맹렬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총회의 결정은 그대로 유지된 가운데, 그 후 콘스탄티노플교회 감독 요한이 로마교회 감독 그레고리 1세에 대해 도전장을 내었으나 앞서 설명한대로 그레고리 1세는 레오 1세와는 달리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거절하면서 어떠한 교회나 사제의 수위권도 부정했다.

      ③ 교황권은 예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레고리 1세가 그토록 반대한 로마교회의 수위권, 즉 교황권이 확립될 수 있었을까?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대감독의 도전을 받던 그레고리 1세는 끝까지 교황제도를 부정하고 거절한다. 그러나 마우리케 황제의 후원을 받던 동로마제국의 요한 감독은 끝까지 교회의 수위권(교황권)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게 되고, 그의 후계자 키리아쿠스 감독도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때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은 동로마에서 플라비우스 포카스(Flavius Phocas Augustus, ? - 610)가 황제 마우리케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른 것이다. 포카스는 큰 어려움 없이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올리고(그 당시에는 로마교회가 동로마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음), 정치적인 이유로 그레고리가 그렇게 반대했던 교회의 수위권을 당시 로마 감독 그레고리의 후계자 보니파우스(607)에게 수여하였다.

       

      수위권의 내용은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었으며, 보니파우스를 정식으로 ‘교황’(교회총대감독)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교회의 수위권과 교황권에 대한 논쟁이 종식된다.
    말하자면 교황이 교회최고수위권을 갖게 된 것은 카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과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황제 포카스가 준 것이며 그 첫 수혜자는 보니파우스였다(607년).
      그러나 이때 교황권이 확립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후에 동로마제국의 후퇴와 서로마지역이 격변하는 정세 속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동로마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감독에 대한 다른 지역의 교회들의 복종은 마음에 드는 경우만 따르고 아니면 거절하고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서로마제국을 계승한 프랑크 왕국의 페핀의 정권 찬탈사건이었다. 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의 원조) 궁재였던 페핀이 또한 서로마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합법적인 황제를 추방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는데, 이때 로마 감독 자카리아스(Zacharias)가 페핀에게 협조해 준다!
       페핀은 정권을 찬탈한 후 자신에게 협력한 자카리아스 로마 감독에게 드디어 모든 교회의 수위권을 주게 되는데(754년) 이를 뒷받침하는 조치로 로마 시의 영토와 특히 재판권까지 부여하는 협정을 맺는다! 이로써 로마 감독이 교회최고수위권을 가진 교황이 되어 모든 교회를 통치하는 교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모든 실권을 쥔 로마 교황권의 등장은 자카리아스로 교황 때부터였다.
       

       또한 그 후 768년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768-814) 때에 와서도 역시 같은 정치적 상황으로 교황의 덕을 입은 샤를마뉴가 스테파노 3세에게 교황권을 강화시켜 주는 협정을 맺으면서 교황권을 더욱 튼튼하게 뒷받침해 준다.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교황권은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인 포카스와 페핀 황제, 샤를마뉴 대제가 내려준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은 약 200여 년간의 걸친 역사를 약술한 것이며 참으로 중요한 교황권과 교황교리 탄생의 직접적 역사적 사실이다. 카톨릭의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큉도 교황의 수위권의 정당성을 확정지을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보자면 교황의 수위권은 3~8세기에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교리인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런 과거의 역사자료들의 진실이 밖으로 알려지기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권을 성경 마태복음 16:13-19절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수위권을 주심으로 온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일반 신도들이 교황권의 유래와 확립에 관한 내용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이다.



                  교황 수위권 비판

      (1) 마태복음 6:16-18절 해석-반석의 의미

      로마 카톨릭교회는 마태복음 6:16-18절을 근거로 교회가 초대 교황인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마태복음 6:18절의 카톨릭교회의 해석은 성경의 왜곡해서 본 결과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란 말은 남성명사인데, 그것은 물론 “베드로”라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이 반석”이란 말은 여성명사이므로 그것은 베드로를 의미하지 않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을 비유한 것이다.

     

       이 성경구절에 대한 초대교부들의 견해를 보면, 반석이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믿은 사람은 17명, 반석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라고 믿은 사람은 45명,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입장이 16명, 반석이 모든 사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18명으로, 반석을 베드로 믿은 사람은 전체 96명중 17명뿐이었다. 이것은 17세기 카톨릭 학자 라우노이가 밝힌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성서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만약 여기서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카톨릭교회식으로 주장할 경우 바로 뒤에 나오는 마태복음 16장22, 23절에 보면, 베드로가 곧 사단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예수께서 사단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인가!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그의 교회를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우시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시겠다는 의미로 하신 것이 분명하다.

     

      (2) 마태복음 6:16-18절 해석-천국 열쇠의 의미

      천국 열쇠에 대해서 로마카톨릭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대리해서 세상 교회를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천국 열쇠’ 자체를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매고 푸는 권세가 베드로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18절에서 그와 동일한 권세가 제자들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카르(Carr)는 이 ‘열쇠’에 대하여 유대교에서 서기관들이 임직할 때 상징적인 열쇠를 준 것을 들어 설명하는데, 누가복음 11:52절에서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의 열쇠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말씀 사역)와 관련된 청지기직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열쇠는 복음 선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도록 해주는 권위를 상징한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서 첫째로 유대인 세계에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문을 연 최고의 영예를 얻었는데, 사도행전 2:41-44절에 나타난 바 오순절에 3,000명의 유대인이 회심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쇠는 얼마 후 다른 제자들에게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주어졌고, 이렇게 복음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닫는 동일한 특권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 20)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카톨릭의 주장과는 달리 베드로가 제자들 중의 우두머리 세우심을 받았거나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3)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교황인가?

     카톨릭의 전통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의 첫 번째 교황이고, 그는 로마 교황으로 주후 42~67년까지 25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주후 67년에 순교했다고 한다. 로마 주교가 교황이 된 이유는 베드로가 그곳에서 사목하다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거나 로마의 주교로 사역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베드로’ 조항에 의하면 베드로가 주후 42년부터 67년까지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였다는 신조는 3세기 초에 등장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전설은 이단적인 그룹인 에비온파의 위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의 유명한 고고학자 마루치는 그의 강의에서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고학자 디 로씨는 40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포기했다고 시인했다.

     

        오히려 성경을 연구해 보면, 44년경 베드로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고(행 15), 53년 안디옥에서 바울과 합류하였고(갈 2:11), 58년 바울이 쓴 로마서에 보면, 로마에 있는 27명의 신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아부를 전하고 있으나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 이름조차 없다(롬 16). 당시에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면 바울이 그의 이름을 빠트릴 리가 있겠는가!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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